요약
생명체
삶의 경험에서 오는 예술적인 것을 현대에 와서는 삶과 분리했다.
생명체와 ‘천상의 사물들’
타자와의 경험에서 예술의 원천이 나온다.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
- 완결된 경험을 가져야 한다.
- 완전한 경험의 경우, 형식이 갖추어진 것은 역동적인 조직화(성장)
- 포괄적 종결을 향한 본질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저항, 긴장, 흥분의 전향이 바로 미적 경험
콘텐츠
목차
- 생명체
- 생명체와 ‘천상의 사물들’
-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
제1장 생명체
실제의 예술 작품은 경험과 함께 하며 경험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온갖 형태의 인간적 노력, 인고, 성취 등의 목적이나 내용과도 연관이 없는 단절된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주의 깊은 사람의 이목을 끌어,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기쁨을 주는 사건이나 광경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질주하는 소방차, 땅에 거대한 구멍을 파는 굴착기, 파리처럼 절벽을 기어오르는 사람, 높은 대들보 위에 앉아 작열하는 볼트를 주거니 받거닌 하는 사람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타는 장작 더미를 들쑤시는 사람은 불이 더 잘타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색색의 드라마에 매혹되며, 이런저런 상상을 한다. 그는 무관심한 구경꾼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정신과 신체의 활동에 행복하게 몰입하는 사람들에 관한 한 콜리지 Samuel T.Coleridge가 시독자들에게 한 말은 타당하다. “독자들은 단지 혹은 주로 기계적인 호기심의 충동이나 궁극의 결말에 도달하고자 하는 부단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의 유쾌한 활동에 이끌린다.” 조건과 기회를 바꾼다면 옛 장인들의 생산물에 손색이 없는 가치 있는 물건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예술로 알고 있는 그 무엇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갇히게 될 때, 그 자체로 향유할 만한 경험을 향한 충동이 일상 화녕에서 제공되는 발산 수단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외심과 비실재가 뒤섞인 아우라는 ‘정신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을 포함하는 반면에 ‘물질’은 설명이 필요하고 해명되어야 하는 경멸적인 말이 되었다. 전쟁, 예배, 포럼 등에서 나타난 단체 생황에서는 이 장소나 기능이 가지는 특징과, 그것들에 색채, 우아, 위엄을 가져다 주는 예술 간의 분리가 왜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그림과 조각은 유기적으로 건축과 하나였으며 마찬가지로 건축물들도 사회적 목적에 일치되는 것으로서 설립되었다. 음악과 노래는 집단생활의 의미를 완전하게 하는 의식과 제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연극은 집단생활의 의미를 완전하게 하는 의식과 제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연극은 집단생활의 전설과 역사의 활기찬 재연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서조차 그러한 예술은 직접적인 경험에 속하는 배경에서 분리될 수 없고 게다가 그 의미 깊은 성격을 유지할 수 없다. 드라마만이 아니라 운동 경기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교육하고 영광을 기념하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면서 종족과 집단의 전통을 축하하고 공고히 했다. 아테네의 그리스인들이 예술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일종의 재현이나 모방의 활동이라는 개념을 행성햇다. … 예술과 일상생활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증언이다. 대부분의 유럽 미술관들은 국수주의나 제국주의의 발흥에 따른 기념물이다. 모든 수도에는 여러 가지 회화, 조각 등의 미슬관이 있는데, 과거 자국 예술의 위대함을 보일 목적으로 설림 된 것이 있는가 하면, 그 나라가 타국을 정복하면서 노획한 전리품을 과시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도 있다. 대체로 전형적인 수집가는 전형적인 자본가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나 국가도 오페라 하우스나 갤러리, 미술관으로 그들이 좋은 문화적 취미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산업은 기계화되어왔지만 예술가는 기계화된 작업으로 대량 생산을 해낼 수 없다. 예술 철학들은 그 무엇도 서식할 수 없는 불모지에 예술을 위치시키고 또한 미적인 것(the esthetic)의 단지 관조적인 특성만을 비정상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그 평가를 다른 경험 양식들로부터 차단시켜 자기들만의 영역속에 가두어버리는 이론들은 주제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외적 조건들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라는 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행복의 불가결한 요소인 심지적 지각을 쫓아내든가 혹은 그것들을 찰나적인 쾌의 흥분을 보상하는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미적 경험의 연속성을 정상적인 삶의 과정들로 회복하는 문제 일상 경험의 의미가 제대로 표현될 때 예술 작품이 일상에서 유출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현행 이론들의 난관은 예술을 기성의 구획으로 위치시킴으로써, 혹은 구체적 경험의 대상들과 단절시켜 예술을 ‘정신화’하는 예술의 개념으로부터 이론이 시작되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화에 대한 대안은 예술 작품의 비속화, 저열한 물질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들이 일상의 경험 속에 존재하는 성질들을 이상화하는 방식을 밝히는 어떤 개념에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직접적인 인간적 배경 속에 놓일 경우, 격리적인 예술 이론들이 일반의 동의를 얻을 때보다 더 폭넓은 지지를 얻을 것이다. 우리가 ‘정상적 경험’이라 할 때 그 의미에 대해 명료하고 사리에 맞는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술이 일상 경험으로부터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뿐, 이 문제들에 대해 그 이상의 답은 제시할 수 없다. 다행히도 그러한 개념에 이르는 길은 열려 있고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다. 경험의 본질은 생명의 필수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다. 생명체의 피하 기관들은 시체 밖에 있는 것과 접속하는 수단이며, 살기 위해서는 화해하고 방어하고 정복함으로써 외계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매 순간 외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또학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환경 안에서 무언가에 의존해야 한다. 생물의 생애와 운명은 환경과의 상호 교환과 밀접하다. 외면적으로 가 아니라 가장 긴밀한 방식으로 말이다. 절서는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힘드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조화로운 상호작용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질서 자체는 발전 성장한다. 질서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들을 그 균형 잡힌 운동 속에 포용한다. 자기와 환경과의 통합의 상실, 그리고 일치의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은 인간 안에서 지속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의식적이게 된다. 그 리듬의 조건들은 사람이 목적을 정하는 데 소재가 된다. 직접적 경험은 자연과 인간이 상호 작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상호 작용 속에서 인간의 활동 에너지는 결집되고, 완화되고, 억압되고, 좌절하고, 승리한다. 여기에 결핍과 충족이라는 규칙적 박동들, 그리고 행위와 행위를 억제하는 맥동들이 수반된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정성과 질서를 가져오는 모든 상호 작용은 리듬이다. … 질서 있는 변화가 존재한다. 변화는 한계 내에서 움직인다.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파멸이자 죽음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새로운 율돌이 생겨난다…. 그 결과는 조화와 평형이다. 행복과 기쁨은 우리 심중 심연에까지 이르는 성취에서 온다. 즉, 온전한 우리와 생존 조건과의 화합이라는 성취 말이다. 삶의 과정에서 평형의 시기에 이르는 것은 동시에 환경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 관계는 투쟁을 통해 새로운 적응을 이루어내는 과정에 있다. 완성의 시간은 또한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다. 성취와 조화의 시간에 수반되는 향유를 그 기한을 넘어서까지 영속화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의 삶과 과거, 미래 사이에 흔히 틈새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경우 과거는 그들에게 무거운 짐처럼 지워져 있고, 후회, 사용되지 못한 기회, 원하지 않았던 결과의 의미로 현재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과거는 자신 있게 앞으로 전진시키는 수단들의 창고가 아니라, 하나의 억압으로서 현재에 걸쳐져 있다. 그러나 생물은 과거를 그엊ㅇ함은 물론, 과거의 어리석음과도 타협하며, 그것들을 현재의 신중함으 배가시키는 타산지석으로 삼는다. 생명체는 과거에 이루어진 것 위에서 살고자 하지 않고, 현재를 알려주는 것으로서 과거의 성공을 이용한다. ‘고요한 반향’ 덕분이다. 행복한 경험의 시간은 경험이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전망에 몰입되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순간이 미의 이상(esthetic ideal)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가 근심을 덜게 하고 미래의 전망들이 불안하지 않을 때에만 생물은 환경과 온전히 융합되며, 따라서 제대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과거가 현재를 강화하고 미래가 현재를 고무하는 계기들을 아주 치열하게 경축하는 것이다. 개는 결코 현학적이지도 아카데믹하지도 않다. … 과거가 의식 속에서 현재와 단절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이 복제하기 위해 있는 모델이나 혹은 물건을 꺼내 쓰기 위해 있는 저장소처럼 존재하는 경우 말이다. 이 경우 현재 속에 융합된 과거는 계속 위력을 발휘하며, 다른 것을 물리치고 나아간다. 경험이 진실로 경험인 한, 그것은 고양된 활력이다. 경험은 누군가 혼자만의 감정이나 감각 속에 밀폐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은 세계와의 능동적이고 빈틈없는 교류를 의미한다. 최고의 경험은 사물과 사건들의 세계와 자아의 완전한 상호 침투를 의미한다. 그것은 변덕과 무질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느 ㄴ것이 아니다. 경험은 정체가 아닌 안정성, 즉 리드믹 하게 발전해가는 안저엉이라는 우리의 유일한 예증을 제공해준다. 경험은 예술의 맹아이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것은 사물들의 세계에서 힘겹게 얻은 위업이자 성취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초기의 형태에서도 미적 경험이라는 유쾌한 지각의 기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제 2장 생명체와 ‘천상의 사물들’
‘감각’의 의미는 광범위하다. 감각적인 것, 선정적인 것, 감수적인 것, 감각적인 것, 정감적인 것, 감성적인 것 등. 감각은 있는 그대로의 신체적, 정서적 자극부터 의미 그 자체 — 즉 직접적 경험에 나타나는 여러 사물의 의미 — 까지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 각 용어는 생명이 감각 기관들을 통해 나타날 때의, 유기적 생명체의 삶의 어떤 현실적 측면과 양상에 관계된다. 그러나 그 자명한 의미와 같이 경험 속에 직접적으로 구체화되는 의미로서의 감각은, 감각 기관들이 온전한 실현에 이를 때의 그것들의 기능을 표현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체가 자기 주위 세계의 작용에 직접 관여하는 수단인 그 기관들이 바로 감각이다. 이러한 참여 속에서 이 세계에 대한 다양한 경이와 광채는 생명체가 경헌 하는 성질들이 되어 현실화하게 된다. 이 경우 소재는 유기체의 활동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운동 기관과 ‘의지’ 그 자체가 이 참여를 수학하고 유도하는 수단들이기 때문이다. 소재는 또한 ‘지적인 것’에 대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정신이 감각을 통해서 참여를 의미 있게 하는 수단이며, 그 의미와 가치들을 추출하고 유지하며 살아 있는 생명체와 환경 간의 교통에 더 많은 기여를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유기체와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이 완전하게 수행될 때 그것은 참여와 소통으로 변하며, 경험은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이자 징표이며 보상이다. 운동 기관과 결부된 감각 기관들은 이러한 참여의 수단이다. 따라서 기관들 모두의 손상은 그것이 실천적이든 이론적이든 협ㅅ소하고 둔한 생활-경험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마음과 신체, 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등의 여러 가지 대입은 근본적으로 생활이 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 기원이 있다. 그것들은 위축과 후퇴의 징표이다. 다른 동물들에 비교해 인간에게는 저항화 긴장의 기회가 더욱 많고, 실험과 발명이 더욱 요구되고, 따라서 그 활동은 아주 참신해지고 성찰은 광범위하게 심화되고 감정은 한층 치열해진다. 유기체의 복잡성이 증가됨으로써 환경과 관련한 투쟁과 완성의 리듦들은 다양해지고 장기화되며, 리듬 내부에 무한히 다양한 미세 리듬들을 포함하기에 이른다. 삶의 밑그림이 확장되고 풍요로워진다. 일의 성취는 더욱 커지고 더욱 미묘한 음영을 드리우게 된다. 공간은 인간이 종사하는 다양한 행위와 체험들로 질서 잡혀 있는 둘레의 광험위한 장면이 된다. 시간은 몇몇 철학자들이 주장해온 순간적인 점들의 연속도 아니고, 끝없는 한결같은 흐름도 아니다. 시간은 또한 대망의 충동, 전진과 후퇴 운동, 저항과 휴지라는 리드믹 한 조수의 간만이 수행과 완성으로 조직된 매개이며, 또한 이것들을 조직하는 매개이다. 시간은 성장과 성숙의 질서이다. 섬광이 감음의 세계에 비출 때 대상의 순간적인 인지가 이루어 진다. … 형식이란 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발전해가는 생활 경험의 모든 과정 속에서 나타난 시공의 조직에 포함된 것을 명료하게 하는 기술이다. … 그때 새는 둥지를 짓고 비버는 둑을 짓는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말을 여기에 적용하는데 주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갖 숙고와 의식적 지향은 여러 생득적인 에너지의 상호 활동을 통해 이미 유기적으로 수행된 일에서 생겨난다…. 인류의 탁월한 공헌은 자연에서 발견된 여러 관계들을 의식한 데 있다. 의식에 의해 인간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인과 관계들을 수단과 결과의 관계로 바꾸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의식 그 자체는 그러한 변화의 단서가 된다. 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추상적으로 서술되어온 것들에 대한 구체적 증거이다. 예술의 존재는 사람이 자기 생명을 확장 시킬 의도로 물질이나 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증거임, 또한 인간 자신과 기관, 즉 두뇌, 감각 기관, 근육 조직 등의 구조와 일치해 그것을 행한다는 증거이다. 예술은 생물의 특징이 되는 감각, 욕구, 충동, 활동 등의 총합을, 인간이 의식적으로 혹은 의미의 차원에서 복구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생생하고 구체적은 증거이다…. 그러나 의식의 이런 개입은 또한 의식적 이념으로서의 예술의 이념으로 인도하고, 인류 사상 최대의 지적 위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결국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단절되고 서로 대립될지라도, 그 이상이 구체화될 수 있고 실현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이 있음에 틀림없다. ‘질료’가 의미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양자 대립의 사상이 유행한다는 것은 자유로운 생각들을 실행으로 옮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을 억압적인 부담으로 변환시키는 힘, 또한 잇ㅇ으로 하여금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분위기 속의 막연한 열 말이 되게 하는 힘이 광범위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자연은 인간의 모태이자 터전이다.
생기 있게 자라는 풀밭이 보이지 않고 새소리나 시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면 나는 온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이 세계나 인생은 자신들이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유쾌하거나 재미있지 않으며, 자신들은 끝까지 냉정하게 세계 나 인생을 바라본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온전히 살아 있다 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세계도, 혹은 세계 안의 어떤 것도一 풀잎 하나조차-명확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W. H. Hudson사람이 사고라는 최고의 비상으로 도달한 적이 있거나, 어떤 예리한 통찰로 꿰뚫어본 적이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감각의 중심이자 핵심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과학이나 학문과 마찬가지로음악, 회화, 조각, 건축, 드라마, 소설 등이 종교의 시녀 역할을 했다. 교회 밖의 예술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교회 의식과 제례는 최대한의 정서적, 상상적 매력으로 부여하는 조건 아래 만들어진 예술이었다. 왜냐하면 이 예술을 접한 사람들이 영원한 영광과 축복을 얻는 데 필요한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확신 이상의 격한 심취를 예술 이외의 무엇이 그들에게 줄 수 있을지 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중세 기독교는부분적으로그것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에 의해 번창했다. 도덕 혹은 영적 감정에 대해 갖가지 감각적 심상 들올 가지고 있었던 라틴찬미 작곡자들이 깊이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었다. 열정의 출구가 봉쇄되면 신경의 긴장이 생기는데, 거기서 감각적 세계는 찬란한 광채와 구원과 합일한다. 그리하여 모든 붉은 것은 피가 되고, 물은 눈물이 되었다. 모든 중세의 시가(詩歌)에서 감각은 극도로 왜곡되었으며, 자연물은 기괴한 열광적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자연물들에 대해 중세 사람들은 깊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감각은 객관적이지도 않았고, 우리 외부 세계로의 현실적인 도피처도 아니었다.예술가는 “일월성신 혹은 지구나 지상의 여러 가지를 그보다 더 위대한 것, 즉 천상의 것一창조주가 몸소 만든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一올 만들어내는 소재”로서 바라볼 수 있올 것이다. 키츠를 인용함에 있어 그가 예술가의 태도와 살아 있는 생명체의 태도를 동일시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을 시의 취향으로서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식하고 반성한 후 분명히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나 또한 공감하는 바이다.매와 같은 본능과 자신의 목표물에서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아주 위대한 부분이다. 매나 사람이나 짝올 원한다. 이들 둘 올 보라. 둘 다동 일한 방식으로 시작하여 상대를 획득한다. 둘 다 둥지를 필요로 하며, 동일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둘 다 동일한 방식으로 먹이를 획득한다. 고상한 동물인 인간은 담배를 즐기지만, 매는 구름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이것은 그들의 여가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색적인 사람에게 삶의 재미를 주는 것이다. 들판에 나가 걷다 보면 담비나 들쥐가 질주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무엇을 위해 질주하는 것일까. 생명체는 목적을 갖고 있고, 그의 눈은 목적으로 말미암아 빛난다.여기서까지 내가 가장 인간적인 동물처럼 본능적 과정을 추구하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어떤 주장이나 견해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암흑 가운데서 희미한 빛을 구하나 비록 어리지만 이것저것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홈 없다 할 수 있을까? 내가 담비의 민첩함이 나 사슴의 불안감을 보고 즐기듯이, 본능적이기는 하나 나의 정신이 빠져들 수도 있는 우아한 태도로 즐거워하는 훌륭한 존재란 없는 것일까?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형 오감 올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발휘되는 에너지는 볼 만하다. 가장 평범한 남자가 싸울 때도 기풍이 있는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 가본다면 우리의 추리라는 것에서 이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나름대로 훌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가를 구성하는 데 진수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추리도 있지만, 추리는 동물의 지체나 운동과 같이 본능의 형식을 취할 때 시가 되며, 아울러 아름답고 기풍이 있다.첫째, 우리reasoning’는 야생 동물이 목표물을 향해하는 운동과 비슷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자발적이고 ‘본능적’이며, 본능적일 때 감각적이고 직접적이고 시적(詩的)이라는 확신이다. 둘째, 이 확신의 다른 면은 그가 추리로서의 ‘추리’, 즉 상상력과 감각을 배계한 추리에 의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에게서조차 사색을 결론으로 이끄는 데서 동물적인 좋고 싫음이 개입된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감정의 흐름대로 취사선택한다. 최고의 ‘이성’은 완전한 이해와 자기 충족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으며, 관념을 정서적 감각 안에 구체화하는 작용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상상력의 통찰이면 충분하다. “이는 당신들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라는 말이다. 이는 ‘사실과 논거를 따라 성급하게 도달하는 일’이 사태를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혼란과 왜곡을 가져오는 정황을 의미한다. 키츠가 극도의 위로와 깊은 확신을 찾은 것은 매우 강렬한 미적 지각의 순간에서였다. 그의 시 말미에 언급된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궁극적으로 두 가지 철학이 있을 따름이다. 그중 하나는 그 모든 불확실성, 신비, 회의, 어중간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삶과 경험을 받아들이며, 그 자체의 성질들을 심화하고 강화하기 위하여-상상력과 예술에 대하여-그 경험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3장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
경험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환경 조건의 상호 작용이 생활 과정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항과 갈등의 상태에서는 이 상호 작용에 내포된 자아와 세계의 양상이나 요소가 정서와 관념으로써 경험을 규정해서 거기에서 의식적인 의도가 발생한다. 그러나 경험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때로 불완전하다. 사물들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경험으로 구성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주의가 산만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지기도 한다. 우리가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 바라고 얻는 것 등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쟁기질하다가 날을 접기도 하며, 일을 시작했다가 멈추기도 하는데, 이는 경험이 처음의 목적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장애나 내면의 무기력 때문이다. 그러한 경험과는 반대로, 경험되는 내용이 순조롭게 완성에 다다를 때 우리는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 그럴 때만 경험은 내면적으로 완성되고, 경험 전체의 흐름 속에서 다른 경험과 구별된다. 작풍 하나가 아주 만족스럽게 종결되며,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게임이 최후까지 진행된다. 경험에서 흐름은 무언가로부터 무언가로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경험을 하는 경우 연속적인 융합이 일어나고, 따라서 간헐도 없으며, 기계적인 접합점도 없고, 부동의 중심들도 없다. 경험에는 하나의 통일성이 있어, 경험에 ‘그 식사’, ‘그 폭풍’, ‘우정의 결렬’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사고 과정의 이론적 공식은 종종 ‘결론’과, 발전해가는 모든 완전한 경험이라는 절정 국면과의 유사성을 교묘히 감추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실제 ‘사고’라는 경험에서는 하나의 결론이 명백해질 때만 전제가 발생한다. 폭풍의 격렬함이 절정에 이르다가 이윽고 서서히 장장해지는 것을 보는 것 같은 경험은 중점 내용의 지속적 진행의 하나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대양처럼 경험에도 계속되는 파도들이 있다. 착상들이 밀어닥쳐 오다가 부딪쳐 포말로 부서지며, 또한 함께 밀어닥치는 파도에 떠밀린다.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예상과 축적이라는 운동의 종결이며, 결국 완성에 이르는 운동이다. 하나의 결론은 개별적인 것이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동의 완성이다. 경험은 그 자체의 미적 성질올 지니고 있다 정서적 성질이 지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이 탐구를 정당화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계기일 뿐 아니라, 탐구가 이 성질로 완성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지적 활동도 하나의 통합적 사건(즉, 하나의 경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경험을 수행하는 데는 관심이 개재한다. 그 경험이라는 것이 세계에 해로울지도 모르며,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에도 미적 성질이 있는 것이다. 선한 행위를 비례, 우아, 그리고 조화를 가진 어떤 행위와 동일시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선미라는 것은, 도덕적 행위 특유의 미적 성질의 한층 명백한 예이다 많은 경험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의 사건과 그 선행 사건 그리고 후속 사건과의 관련에 관심을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깊이 행동하는 경험 속에서 조직할 수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취사선택하는 것을 조절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이 명확히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단호하게 배척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의 압박에 따라 굴복하고, 혹은 피하고, 혹은 타협한다. 거기에는 시작과 중단이 있지만, 진정한 단초나 완결은 없다. 하나의 사물은 또 다른 사울 올 차지하지만, 그것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계속 지탱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경험이 있지만 그것은 아주 산만하고 느슨하여 도저히 ‘하나의 경험’이라 할 수가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경험들은 비(非) 미적인 것이다. 자체의 완성을 목표로 진행하고 발전하는 경험의 특징들이다. 성숙과 고착은 정반대의 것이다. 투쟁과 갈등은,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그것들이 하나의 경험을 발전시키는 수단들로 경험된다면 그 자체로 향유될 만한 것이다. 단지 투쟁과 갈둥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다. 투쟁과 갈등은 경험을 진전시키는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 경험은 정서적이지만 경험 속에 정서라 불리는 것들이 분리되어 존재하지는 않는다. 정서는 확실히 자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결과이든 기피해야 할 결과이든 어떤 결과를 향해 운동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갖는 자아에 속한다. 정서는 어떤 경험의 다양한 부분들 가운데, 그리고 다양한 부분들을 통해 통일성을 부여한다. 통일성이 앞에서 기술된 그런 종류의 것인 경우, 경험은 두드러지게 미적인 경험이 아닐지라도 미적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경험이란 다양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 자체의 완성으로 향하는, 진행과 정지를 포함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공통의 패턴의 개요를 말하자면, 모든 경험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그것이 살고 있는 세계의 어떤 국면과의 사이에서 행해지는 상호 작용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경험은 패턴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계에 작용을 행사하는 것과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 즉 능동과 수동이 단지 교차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관련하에 행해지는 데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행위와 그 결과는 반드시 지각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모든 지성의 목표이다. 감수성의 과잉 또한 경험의 완성에 방해가 된다. 능동적으로 행해지는 것과 수동적으로 행해지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성의 일이기 때문이며,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 속에서, 이미 행한 것과 앞으로 행할 것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란 무용한 사치품이나 초월적인 관념의 소산으로서 외부에서 경험 가운데로 침입해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정상적이고 완전한 경험을 가진 성질의 명료하고도 강화된 발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나는 이 사실이야말로 미학 이론이 세워질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기초라고 생각한다 때 ‘예술적artistic’이라는 말과 ‘미적 esthetic’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명료하게 합쳐 함축하는 영어 단어는 없다. ‘예술적’이라는 말은 본래 창작의 행위와 관계돼지만 ‘미적’이라는 말은 인식과 향유와 관계되 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함께 묶어 표현하는 하나의 낱말이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이란 표현에 있어 완벽하고자 하는 노력이다,반면 매튜 아널드Matthew Arnold는 예술을 “순수하고도 결점 없는 기량”이라고 부른다 계적’이라는 말은 앞서 지적했듯이 감상적, 인식적, 향유적인 것으로서의 경험과 관련된다. 그것은 생산자의 관점보다는 향유자의 관점을 드러 낸다. 그것은 취미 taste)이다 진실로 예술적이기 위해서는 미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즐길 만한 수용적 인식을 위한 것이 어야 한다. 물론 예술가는 창작하는 동안 꾸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지각이 사실상 미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계적인 과정 속에서 다음 단계를 향한 자극으로서 행해지고 사용된 것을 중립적으로 냉정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예술은 경험을 경험답게 하는 관계와 같이 능동적 행위와 수동적 행위, 에너지의 방출과 흡입의 관계를 그 형식 속에서 결합한다. 예술가는 작업하는 동안 인식자의 태도를 자기 자신 안에서 구체화한다. 모든 미적 지각에는 정열 passion이라는 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격렬한 분노, 공포, 질투와 같이, 우리가 정열에 압도당할 때 그 경험이 미적이지 않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 경우 정열을 발생시킨 활동의 성질에 대한 관계가 감지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경험의 소재에는 균형과 안정의 요소들이 없다. 왜냐하면 이 균형과 안정은 우아함이나 위엄이 있는 행동의 경우와 같이, 행위가 그것이 유지하는 관계들의 적절한 감지에 의해, 예를 들면 때와 장소에 맞게 제어되는 때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창작의 과정은 미의 인식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손과 눈 둘 다 전인적 존재의 기관으로서 활동하지 않을 때, 자동적인 걸음걸이의 경우처럼 기계적인 연속의 감각과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경험이 미적이라면 손과 눈은 전 생명체가 시종 작동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표현은 정서적이며 목적에 의해 유도된다. 능동적 행위는 힘차고 수동적 체험은 깊고 강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 속에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결속되어 있지 못하다면 행해진 것이 온전히 미적일 수는 없다. 만약 예술가가 행위 과정에서 어떤 참신한 비전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는 기계적으로 행위하며 마음속의 청사진처럼 일정한 원본을 반복하는 것이다. 창의적 예술 작풍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관찰과 질적 관계들의 지각 속에서 표현된 지성을 통해 규정된다. 진정한 예술가의 작품은 경험이 발전하며 부단히 변화해나가는 동안, 지각 속에서 통일된 하나의 경험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외적인 구체물이 없으면 경험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인식이란 그것이 자유롭게 발전할 기회를 갖기 전에 정돈되는 지각이다. 인식을 할 때는 지각 행위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작이 인식된 사물을 완전하게 지각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리에서 어떤 사랑을 인식할 때도, 그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를 할 것인지 아니면 피할 것인지를 정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즉 인식이 어떤 다른 목적에 부합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인식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정지된다 단순한 인식은 적당한 이름표나 라벨이 붙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지각 행위는 유기체 전신을 통해 순차적으로 확장해나가는 파동에 의해 진행된다. 따라서 정서가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부가되는 것과 같은 일이 지각에서는 없다. 이유는 관람을 위해 관람자가 자기만의 경험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창작은 원래의 작가가 수동적으로 체험한 것들에 비견되는 관계 들올 포함해야 한다. 경험된 전체 내에서 물리적으로 산재해 있는 세부와 부분들을 모으는 일이 행해진다. 지금까지의 고찰들은 의미심장한 하나의 경험과 미적 경험 간의 공통점을 보여중과 동시에 특수한 점을 강조하여 양자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전자, 즉 하나의 경험은 미적 성질을 지닌다. 그렇지 않으면 그 소재들은 단일의 통일적 경험 속으로 완성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근원적 경험 속에서 실천적, 정서적, 지적인 것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또한 어느 한 속성으로 하여금 다른 속성들의 특징에 반하여 압도하게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정서적 경험은 부분 들올 단일의 전체 안으로 규합한다. 그리고 ‘지적’이라는 것은 다만 경험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실천적 practical’이라는 것은 유기체가 그것 울 둘러싸고 있는 사건들과 대상들과 상호 작용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종속적인 그것들이 바로 지배적인 성질이다. 즉, 경험이 그 자체로 완전한 경험다운 성질인 것이다. 모든 완전한 경험의 경우, 형식이 갖추어진 것은 역동적인 조직화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조직화를 역동적이라 하는 것은 이것 올 완성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며, 그것이 하나의 성장이기 때문이다. 포함적, 완성적 종결을 향한 본질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저항, 긴장, 흥분의 전향이 바로 미적 경험인 것이다.
출처「경험으로서의 예술」 존 듀이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