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많고 방대한 것을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언어는 타자와의 소통수단이다. 하지만 타자와의 소통수단만은 아니다. 나 스스로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고치고 언어로 근육에 명령을 내리는 듯하다.
지금은 타자를 잘 치지만 중학교 1학년 떄, 컴퓨터 선생님께 맞아가면서 250타를 넘기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서 매번 메밀꽃 필 무렵을 쳤다. 그때 생각해보면 자판의 위치를 외우고 그곳에 손가락이 가서 누르는 동작을 할 수 있어질 때까지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생각을 이런 과정 없이 타자 위에서 자유로이 써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하지 않으며 말하는 동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생각 자체인 것이다…. 생각은 내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세계와 말의 밖에 있지도 않다. 그 점에서 우리를 속이는 것, 표현 앞에 대자적으로 전재한다는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 이것은 이미 구성된 것이자 이미 표현된 생각들이며, 이것들을 우리는 말없이 스스로에게 회상시키고 이것들에 의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적 삶의 환상을 제공한다.
『지각의 현상학』, 메를로 퐁튀
앞서 적은 말들을 뒷받침하는 메를로 퐁티의 한 구절이다. 말과 생각의 선후관계를 나눌 수 없다. 생각을 언어로 하고, 언어를 생각하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 내가 먼저 있어서 나를 볼 수 있는 것인지, 거울이 있어서 나를 볼 수 있는 것인지 빛이 있어서 나를 볼 수 있는 것인지 결국 복합적인 이야기이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얻었다면 통발은 잊는다. 올무는 토끼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토끼를 얻었다면 올무는 잊는다. 말은 뜻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장자』, 「외물」, 장자
언어를 생각할 떄 항상 생각은 장자의 한 구절인데, 결국 우리는 껍데기와 알맹이의 관계를 계속 나누어서 사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지만 결국 내용은 하나 명심해야 되는 것은 우리는 껍데기 없이 살고 소통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표현들과 몇 개 되지 않는 내용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분리하고 싶어 지는 욕망이 든다. 그렇지만 이 시리즈가 끝날 때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언어에 대한 관념이 생겼으면 한다.
생각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