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경제학자 케인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신이 도착했다!”이 말은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집필하고 학계를 떠났다가,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올 때 썼던 편지이다. 케인즈도 천재인데, 천재가 말하는 신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왔을까? 바로 초기 철학의 문제점을 살면서 발견해 이것을 수정하고자 왔던 것이다.
철학적 탐구
실제 언어를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논리학의 수정 같은 순수성이란 물론 탐구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요구 조건이었다.) 그 갈등은 감당하기 힘들어 진다. 요구 조건은 이제 공허한 것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진술하는 대신, 나는 이러한 현상들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모두에 대해 같은 낱말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어떤 일자가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니고, 그것들을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유사하다고 말한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다양한 삶의 문맥에서 사용되는 상이한 성격들의 언어들을 가리킨다. 가령 케임브리지와 같은 곳에서는 지성인들의 ‘언어’가 존재한다. 오스트리아 시골말을 같은 곳에서는 시골 사람들 특유의 ‘언어’가 존재한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활용하는 재래시장과 같은 곳에서도 그곳 나름의 ‘언어’가 존재한다. 재판정도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유치원에서도 나름내로 독특한 ‘언어’가 통용된다. 같은 국어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다양한 삶의 문맥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이 서로 다르게 혹은 유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동일한 한 단어라도 삶의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용례로 사용될 수도 있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쓰임에 있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언어와 그 언어에 얽히는 행위로 구성된 전체를 ‘언어 게임’이라 부르겠다” 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언어를 게임이라고 비유할 때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각 언어마다 고유한 규칙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언어 안의 낱말들은 그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각 언어마다 내재하는 고유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느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생각하지 말고, 보라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이 형이상학적 사용을 대표한다면, 장년 비트겐슈타인의 ‘게임이론’은 언어의 형이상학적 사용을 비판하고 일상적 사용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었던 셈이다.
게임의 조건은 반드시 타자가 있어야 하고 장기말이 있어야 하며 공평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게임은 막 재밋게 노는 행위라고 잘못해석하면 안된다.
참고 도서:『철학대철학』, 강신주,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