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철학

  • 왜 우리는 벤야민과 아케이드를 알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벤야민과 아케이드를 알아야 하는가?


    발터 벤야민: 시대를 넘나든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 비평가, 문학 이론가, 그리고 역사가였다. 그의 작업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문화적 구조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며, 이를 통해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19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자본주의의 탄생과 진화 과정을 섬세하게 분석한 작품이다.


    아케이드: 자본주의의 유년기를 탐구하다

    19세기 초, 파리의 아케이드는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상가와 유리 지붕으로 구성된 이 구조물은 소비와 유혹의 중심지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을 보여준다. 이 공간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비 문화를 경험하게 했고, 동시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욕망을 조작하고 확대하는지 보여주는 무대였다. 벤야민은 이러한 아케이드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시작을 탐구하며,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모순과 심리적 영향을 파헤쳤다.


    몽타주와 역사: 새로운 사유의 방식

    벤야민은 글쓰기에서 몽타주 기법을 활용했다. 이는 다양한 자료를 조합하여 새로운 통찰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아케이드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는 자본주의를 단순히 ‘좋다’ 혹은 ‘나쁘다’로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고, 이 체계의 양면성을 철저히 해부했다. 벤야민의 몽타주 방식은 현대의 디지털 콘텐츠 구성 방식과도 닮아 있으며, 그의 작품은 지금도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산책자의 시선으로 본 자본주의

    산책자(플라뇌르)는 보들레르와 벤야민이 공통적으로 탐구한 개념이다. 도시를 자유롭게 거닐며 관찰하는 산책자는 도시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일상을 잠식하는지 포착한다. 벤야민에게 산책자는 단순한 도시의 방랑자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를 읽어내는 관찰자이자 해석자였다. 그의 관점에서 도시 공간은 소비와 환상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모순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19세기 파리: 근대성과 자본주의의 실험실

    벤야민은 19세기 파리를 단순히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분석할 수 있는 거대한 실험실로 바라봤다. 파리는 자본주의의 유년기와 근대성의 중심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기술과 문화, 예술이 결합되며 새로운 소비 문화를 창출했다. 벤야민은 이를 통해 자본주의가 단순히 경제적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탐구했다.


    아케이드와 현대 사회의 연결 고리

    아케이드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비유로 기능한다. 쇼핑몰, 온라인 커머스, 디지털 플랫폼은 아케이드가 했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들은 현대판 욕망의 공간이자, 환상과 소비를 조장하는 새로운 무대로 작동한다. 벤야민의 통찰은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미완의 걸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의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이 남긴 미완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독자들에게 자본주의의 본질과 현대 사회를 재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 그의 작업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지만, 바로 그 점에서 독자에게 더욱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다.


  • 언어와 세계의 철학적 탐구: 《논리철학논고》의 배경 이해하기

    언어와 세계의 철학적 탐구: 《논리철학논고》의 배경 이해하기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 중 하나입니다. 20세기 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언어, 사고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며 철학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는 이러한 탐구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의 배경과 철학적 의미를 중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여정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공학을 공부하다가 철학으로 전향했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버트런드 러셀을 만나며 논리와 철학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전통적인 철학에서 벗어나 언어와 논리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두 시기로 나뉘는데, 《논리철학논고》는 그의 초기 철학을 대표하며, 후기 철학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흐름

    20세기 초는 과학과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철학은 세계를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특히, 논리 실증주의는 철학을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려는 운동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언어와 과학의 관계를 분석하며 “의미 있는 언어는 논리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언어 분석 철학에도 깊이 연관됩니다. 그는 언어가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그리고 언어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주요 질문인 “세계란 무엇인가?”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이어졌습니다.

    《논리철학논고》의 출간 과정

    《논리철학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이 제1차 세계대전 중 군복무를 하며 작성한 철학적 원고입니다. 이 책은 1921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22년에는 영어 번역본도 출간되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서문을 쓰며 출간을 도왔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해석에 만족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책은 철학적 문제를 언어와 논리의 관점에서 다루며,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언어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리며, 언어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이는 철학사에서 혁신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철학적 의미와 영향력

    《논리철학논고》는 철학적 문제를 언어와 논리의 문제로 환원시켰습니다. 그는 철학이 언어의 사용을 분석하고 명료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 철학에서 “언어적 전환”이라 불리는 새로운 흐름을 열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철학뿐 아니라, 언어학, 논리학, 컴퓨터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설계하는 데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그림 이론”은 데이터와 정보의 표현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의미

    오늘날 《논리철학논고》는 철학적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여전히 많은 논의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단지 학문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 논리적 사고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철저히 탐구한 철학적 작품입니다. 그의 철학적 여정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이 책의 출간 과정과 영향력을 살펴보며, 우리는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명확한 사고를 추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논리철학논고》의 ‘사실’ 개념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논리철학논고》의 ‘사실’ 개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요? 물리적인 사물만이 전부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요소들이 존재할까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대표작 《논리철학논고》에서 이 질문에 답하며, 세계를 “사실들의 총체”로 정의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의 독창적인 세계관과 이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개념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세계와 사실: 무엇이 다른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단순히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실”이란 단순히 물리적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물이 특정 방식으로 연결되고 배열되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이 방에 있다”는 단순한 문장은 하나의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 문장 속에는 책상이라는 사물과 방이라는 공간이 특정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사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체로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즉 사태(situation)입니다. 사태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며, 각 사태는 사실을 통해 나타납니다.

    논리적 공간 속의 사태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사실이 논리적 공간 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논리적 공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일종의 “가상의 세계”입니다. 이 공간 안에서 사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되고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배열 방식이 바로 사태를 이루며, 그 결과가 사실이 됩니다.

    쉽게 말해, 논리적 공간은 우리가 “무엇이 가능한가”를 따져볼 수 있는 사고의 틀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공이 탁자 위에 있다”는 한 가지 가능성이고, “파란 공이 바닥에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입니다. 이 모든 가능성은 논리적 공간 안에 위치하며, 그중 일부가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면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이 됩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비트겐슈타인의 세계관은 사물을 고정된 개체로 보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물 간의 관계와 배열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개념은 현대 물리학이나 데이터 과학 같은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의 상태는 다른 입자와의 관계로 설명되며, 데이터 과학에서도 개별 데이터가 아닌 데이터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습니다.

    또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개별 요소를 보는 대신, 요소 간의 연결과 패턴을 이해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유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적용과 영향력

    비트겐슈타인의 “사실” 개념은 철학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적 영역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의 논리적 공간 개념은 컴퓨터 과학과 프로그래밍에서 상태(state)와 가능성을 다루는 방법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시스템은 다양한 상태의 조합으로 작동하며, 이 상태는 논리적 공간 내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언어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세계와 사실 개념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언어는 단순한 단어들의 집합이 아니라, 단어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되고 관계를 맺을 때 의미를 가집니다. 이 관점은 자연어 처리(NLP)와 같은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적용

    이 철학적 개념은 일상에서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단순히 사물 자체를 보는 대신, 사물 간의 관계와 맥락을 살피는 습관을 들인다면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개별 요소뿐 아니라 그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사물들의 집합”이 아닌 “사실들의 총체”로 정의함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사물과 사태, 그리고 논리적 공간이라는 개념은 현대 철학과 과학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며, 여전히 많은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단지 이론적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실생활에서 관계와 맥락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 언어는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

    언어는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

    우리는 매일 언어를 사용하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언어가 세상을 어떻게 묘사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깊이 연구하며 “그림 이론”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림 이론과 명제가 현실을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실생활에서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예를 소개합니다.

    그림 이론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상을 묘사하는 방식을 그림에 비유했습니다. 그림은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특정 방식으로 재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명제도 세계의 상태를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모사하는 일종의 그림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의자 위에 있다”라는 문장은 고양이와 의자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고양이와 의자가 특정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과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통해 명제가 세계와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림의 논리적 형식과 참/거짓

    그림 이론에 따르면,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올바르게 묘사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명제는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명제가 묘사하는 바와 실제 세계 사이의 일치 여부입니다.

    예를 들어, “하늘이 파랗다”라는 명제가 참이려면 실제 하늘이 파란 상태여야 합니다. 만약 하늘이 흐리거나 어두운 밤이라면 이 명제는 거짓이 됩니다. 이렇게 명제는 세계의 상태를 논리적으로 반영하며, 그 참과 거짓은 실제 현실과의 비교를 통해 결정됩니다.

    명제와 그림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둘 다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논리적 형식은 명제와 세계의 구조적 유사성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 사람과 나무의 위치가 실제 세계에서의 위치와 동일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다면, 이 그림은 현실을 정확히 모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명제도 마찬가지로, 논리적 형식이 세계와 일치해야 참이 됩니다.

    실생활에서의 그림 이론 이해

    그림 이론을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상상해보세요. 친구가 “책상이 방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방과 책상의 관계를 설명하는 그림과 같습니다. 이제 실제로 방에 들어가 보니 책상이 구석에 있다면, 친구의 말은 잘못된 그림이 됩니다. 반대로, 책상이 방 가운데에 있으면 친구의 말은 정확한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의 상태를 표현하며, 이 표현이 세계와 일치할 때 명제가 참이 됩니다. 그림 이론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를 재현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줍니다.

    그림 이론의 철학적 의미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단순히 언어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철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언어는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가? 언어가 세계를 정확히 묘사하지 못하는 영역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윤리, 미학, 종교와 같은 분야에서도 언어의 한계를 논의할 때 유용합니다.

    예를 들어, 윤리적 명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림처럼 세계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림 이론의 범위를 넘어서는 언어의 사용 방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통해 언어가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림 이론의 현대적 활용

    그림 이론은 현대의 여러 분야에서 실용적으로 응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과학에서 데이터의 시각적 표현은 그림 이론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그래프나 차트는 데이터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 역할을 합니다. 이런 시각적 표현은 복잡한 정보를 쉽게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또한, 그림 이론은 언어학과 자연어 처리(NLP)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활용됩니다. 명제의 구조와 그것이 묘사하는 현실 간의 관계를 이해하면, 컴퓨터가 인간 언어를 더 잘 해석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기술에서 핵심적인 원리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그림 이론이 주는 교훈

    그림 이론은 우리에게 언어가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묘사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그릴” 수 있으며, 이러한 언어의 사용이 우리의 사고와 현실 이해를 형성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그 구조와 논리적 형식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결론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언어가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을 명확히 설명하며, 언어와 세계 간의 깊은 연결을 보여줍니다.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모사하는 그림처럼 작동하며, 참과 거짓은 실제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결정됩니다. 이 이론은 철학적 사고를 확장할 뿐 아니라, 현대 기술과 과학에도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논리철학논고》의 ‘사실’ 개념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논리철학논고》의 ‘사실’ 개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요? 물리적인 사물만이 전부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요소들이 존재할까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대표작 《논리철학논고》에서 이 질문에 답하며, 세계를 “사실들의 총체”로 정의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의 독창적인 세계관과 이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개념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세계와 사실: 무엇이 다른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단순히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실”이란 단순히 물리적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물이 특정 방식으로 연결되고 배열되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이 방에 있다”는 단순한 문장은 하나의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 문장 속에는 책상이라는 사물과 방이라는 공간이 특정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사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체로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즉 사태(situation)입니다. 사태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며, 각 사태는 사실을 통해 나타납니다.

    논리적 공간 속의 사태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사실이 논리적 공간 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논리적 공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일종의 “가상의 세계”입니다. 이 공간 안에서 사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되고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배열 방식이 바로 사태를 이루며, 그 결과가 사실이 됩니다.

    쉽게 말해, 논리적 공간은 우리가 “무엇이 가능한가”를 따져볼 수 있는 사고의 틀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공이 탁자 위에 있다”는 한 가지 가능성이고, “파란 공이 바닥에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입니다. 이 모든 가능성은 논리적 공간 안에 위치하며, 그중 일부가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면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이 됩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비트겐슈타인의 세계관은 사물을 고정된 개체로 보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물 간의 관계와 배열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개념은 현대 물리학이나 데이터 과학 같은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의 상태는 다른 입자와의 관계로 설명되며, 데이터 과학에서도 개별 데이터가 아닌 데이터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습니다.

    또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개별 요소를 보는 대신, 요소 간의 연결과 패턴을 이해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유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적용과 영향력

    비트겐슈타인의 “사실” 개념은 철학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적 영역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의 논리적 공간 개념은 컴퓨터 과학과 프로그래밍에서 상태(state)와 가능성을 다루는 방법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시스템은 다양한 상태의 조합으로 작동하며, 이 상태는 논리적 공간 내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언어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세계와 사실 개념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언어는 단순한 단어들의 집합이 아니라, 단어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되고 관계를 맺을 때 의미를 가집니다. 이 관점은 자연어 처리(NLP)와 같은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적용

    이 철학적 개념은 일상에서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단순히 사물 자체를 보는 대신, 사물 간의 관계와 맥락을 살피는 습관을 들인다면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개별 요소뿐 아니라 그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사물들의 집합”이 아닌 “사실들의 총체”로 정의함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사물과 사태, 그리고 논리적 공간이라는 개념은 현대 철학과 과학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며, 여전히 많은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단지 이론적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실생활에서 관계와 맥락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 언어와 세계의 철학적 탐구: 《논리철학논고》의 배경 이해하기

    언어와 세계의 철학적 탐구: 《논리철학논고》의 배경 이해하기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 중 하나입니다. 20세기 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언어, 사고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며 철학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는 이러한 탐구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의 배경과 철학적 의미를 중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여정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공학을 공부하다가 철학으로 전향했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버트런드 러셀을 만나며 논리와 철학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전통적인 철학에서 벗어나 언어와 논리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두 시기로 나뉘는데, 《논리철학논고》는 그의 초기 철학을 대표하며, 후기 철학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흐름

    20세기 초는 과학과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철학은 세계를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특히, 논리 실증주의는 철학을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려는 운동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언어와 과학의 관계를 분석하며 “의미 있는 언어는 논리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언어 분석 철학에도 깊이 연관됩니다. 그는 언어가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그리고 언어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주요 질문인 “세계란 무엇인가?”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이어졌습니다.

    《논리철학논고》의 출간 과정

    《논리철학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이 제1차 세계대전 중 군복무를 하며 작성한 철학적 원고입니다. 이 책은 1921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22년에는 영어 번역본도 출간되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서문을 쓰며 출간을 도왔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해석에 만족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책은 철학적 문제를 언어와 논리의 관점에서 다루며,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언어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리며, 언어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이는 철학사에서 혁신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철학적 의미와 영향력

    《논리철학논고》는 철학적 문제를 언어와 논리의 문제로 환원시켰습니다. 그는 철학이 언어의 사용을 분석하고 명료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 철학에서 “언어적 전환”이라 불리는 새로운 흐름을 열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철학뿐 아니라, 언어학, 논리학, 컴퓨터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설계하는 데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그림 이론”은 데이터와 정보의 표현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의미

    오늘날 《논리철학논고》는 철학적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여전히 많은 논의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단지 학문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 논리적 사고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철저히 탐구한 철학적 작품입니다. 그의 철학적 여정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이 책의 출간 과정과 영향력을 살펴보며, 우리는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명확한 사고를 추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 아우라(Aura)의 본질과 현대적 해석

    아우라(Aura)의 본질과 현대적 해석

    아우라란 무엇인가?

    아우라는 특정 대상이 지닌 독특한 특성을 의미하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가까워도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지는 특별함을 통해 정의됩니다. 예를 들어, 여름날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이나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단순히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의 감각과 감정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러한 특성은 대상의 고유한 존재감을 만들어내며, 그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을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아우라의 붕괴와 사회적 조건

    현대 사회에서는 아우라가 점차 붕괴되고 있습니다. 대중의 열망은 모든 것을 “가까이 끌어들이는 것”으로 향하며, 기술 복제를 통해 대상의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복제 기술은 대상의 독특함을 재현 가능하게 만들지만, 이는 곧 아우라를 파괴하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예술 작품이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단순한 데이터나 이미지로 변환될 때, 일회성과 고유성은 희석됩니다.

    대중의 욕구와 기술 복제의 상호작용

    대중은 기술 복제를 통해 원본에 접근하려는 욕구를 점점 더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는 현대적인 매체, 특히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예술 작품이나 문화적 유산은 더 이상 특정 장소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글 아트 앤 컬처(Google Arts & Culture)와 같은 플랫폼은 전 세계 사람들이 클릭 한 번으로 명작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접근성은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원본에 깃든 아우라의 가치를 감소시킬 위험도 있습니다.

    현대적 사례: NFT와 디지털 아우라

    NFT(Non-Fungible Token)는 디지털 환경에서 아우라를 복원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여 디지털 자산에 고유성을 부여합니다. 이는 디지털 작품이 복제 가능하다는 한계를 극복하고,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디지털 예술가 비플(Beeple)의 작품은 NFT로 판매되며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디지털 시대에도 고유성과 일회성을 유지하려는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줍니다.

    실질적 팁: 아우라를 현대적으로 유지하는 방법

    1. 스토리텔링 강화: 제품, 서비스, 또는 콘텐츠에 고유한 이야기를 담아 소비자와의 정서적 연결을 강화하세요. 예를 들어, 브랜드는 제품의 기원이나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고유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2. 한정판 제작: 물리적 또는 디지털 형태의 한정판을 제공하여 희소성을 높이고, 아우라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3. 경험 제공: 단순히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세요. 예를 들어, 특정 작품을 가상현실(VR)로 감상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좋은 사례입니다.

    결론

    아우라는 단순한 개념 이상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기술 발전과 대중의 변화하는 욕구 속에서도 아우라를 복원하거나 유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예술과 디자인, 비즈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 몸이 만든 마음: 신체화된 인지란 무엇인가?

    몸이 만든 마음: 신체화된 인지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몸과 독립된 것일까요? 고전 철학에서는 종종 인간의 이성을 순수한 정신적 능력으로 보고, 이를 육체와는 분리된 영역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 인지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 감정, 그리고 행동은 신체적 경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신체화된 인지 이론은 우리가 사고하고 느끼는 방식이 신체와 환경에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러한 관점은 특히 철학, 심리학, 그리고 인지과학에서 강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신체화된 인지란 무엇인가?

    신체화된 인지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개념 형성과 이성적 사고는 신체적 경험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추상적인 논리를 넘어, 실제로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무거운 책임”이라는 표현에서 무거움은 실제로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신체적 경험이지만, 이를 통해 책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유적 사고 방식은 단순한 언어 표현을 넘어, 우리의 정신이 개념을 구성하고 구조화하는 방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체 경험과 개념 형성의 상관관계

    일상생활에서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개념은 우리의 신체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높다’라는 개념을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거나 사다리를 오르내리면서 배웁니다. 이는 단순히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개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체 활동을 통해 개념을 체득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이 쌓여 개념이 형성되며, 이는 추상적 사고의 기초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개념 형성은 단순한 언어 학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습득되는 것입니다.

    실제 사례로, 새로운 개념을 배울 때 단순히 설명을 듣는 것보다 실제로 체험하는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리를 배울 때 요리 책을 읽기만 하는 것보다 재료를 직접 만져보고 요리해보는 것이 훨씬 빠르게 기술을 익히게 해줍니다. 이러한 체험적 학습 과정은 신체화된 인지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이성과 감각의 통합

    신체화된 인지 이론은 감각과 운동을 통한 경험이 이성적 사고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이성과 감각을 분리하여 다루던 방식과는 크게 다른 접근입니다. 현대 신경과학은 우리의 두뇌가 감각적 자극에 반응하며, 감각운동 경험을 통해 이성적 추론을 수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의 두뇌는 몸을 통해 얻는 경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념을 형성하며, 이를 바탕으로 논리적 사고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실질적 팁: 신체화된 인지를 활용하는 방법

    1. 경험을 통한 학습법 채택하기
      • 학습을 단순한 정보 암기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으로 접근하면 더욱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 단어를 외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언어를 실제로 사용해 대화를 나누어보는 방식이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체험적 학습은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몸으로 체득된 언어를 빠르게 습득하게 해줍니다.
    2. 신체활동을 통한 창의력 향상
      • 신체 활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창의적 사고를 자극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산책을 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아이디어를 구상해 보면,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보다 창의적인 발상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몸과 마음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체 활동이 정신적 에너지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3. 일상 속에서 감각 경험을 강화하기
      • 일상생활 속에서 감각 경험을 다양하게 늘리면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장소에 방문하여 낯선 문화와 음식을 경험하는 것은 단순한 여행 이상의 가치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감각적 경험이 축적될수록, 이는 새로운 개념과 관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배경 지식이 됩니다.

    신체화된 인지와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신체화된 인지 이론은 인간을 단순히 이성적 존재로 정의하지 않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는 존재로 봅니다. 우리의 사고와 개념 형성이 신체와 환경에 기반을 둔다는 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게 합니다. 즉, 신체화된 인지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환경에 맞춰 적응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하는 고정된 본질을 넘어서, 인간이 유연하고 다변화된 존재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결론

    신체화된 인지 이론은 우리의 개념 형성과 사고가 신체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더욱 깊이 있게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신체화된 인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이러한 신체화된 사고 방식은 개인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이는 곧 우리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 몸과 마음의 연결 고리: 우리는 누구인가?

    몸과 마음의 연결 고리: 우리는 누구인가?

    전통 철학은 오랜 시간 인간을 사고와 이성의 주체로 정의해왔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부터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선언까지, 인간의 본질은 종종 몸을 넘어선 이성에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시각은 인간의 정신을 신체와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은 몸과 마음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을 통해 인간의 사고와 감정, 행동이 단순히 두뇌나 추상적 개념의 산물이 아닌 신체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의 경험과 사고방식은 신체와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신체화된 마음’의 개념은 현대 철학에서 중요한 논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체화된 마음은 인간의 본질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환경에 맞춰 변화하는 존재로 설명함으로써 철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신체화된 마음: 이성과 감각의 융합

    신체화된 마음의 개념은 몸이 우리의 감정, 사고,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추상적인 정신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신체적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어, 따뜻한 음료를 손에 들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친밀함과 연결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따뜻함’을 ‘호의’와 연결시키며 추후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느끼는 데도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 사례로 한 가지를 더 들면,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기 통제력이 강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운동이 단순한 신체 활동을 넘어서, 자기 관리를 통한 성취감을 주고 긍정적 자기 인식을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통해 자기 통제력을 키우는 이 과정은 신체 활동이 정신적인 자아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전통 철학의 한계와 새로운 이해

    전통 철학에서는 인간을 초월적 이성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이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오로지 추상적 사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맹신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지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사고 과정이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전통 철학의 한계가 명확해졌습니다. 무의식적 사고가 인간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무의식적 사고의 예로, 인간이 자동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방어하려는 경향을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오래 믿어 온 신념을 타인이 반박할 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신체화된 경험과 관련이 깊으며, 단순히 이성으로만 통제할 수 없는 본능적인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화된 마음 이론은 이러한 인간의 자동적 방어 메커니즘이 신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신체화된 마음을 통해 본 인간 본성

    인간 본성은 더 이상 고정된 성질의 목록으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변화하고 적응하는 인간의 모습은 끊임없이 환경에 반응하며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갑니다. 현대 신경과학과 생물학적 연구는 인간 본성을 하나의 완성된 개념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인간 본성을 정해진 속성들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적응 가능한 성질로 본다는 점은 전통 철학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철학적 시각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경험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상사에게 질책을 받은 후에도 우리는 그 경험이 자동적으로 기억 속에 남아,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몸이 그 경험을 저장하고, 그 경험에 대한 반응을 기반으로 새로운 행동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는 개인의 경험이 인간 본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실질적 팁: 신체화된 마음을 활용하는 방법

    1. 감각 경험을 활용한 학습: 단순히 이론으로 배우는 것보다 실제 신체적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방식이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팀워크를 배우는 경우 단순히 이론을 배우기보다는 팀 빌딩 활동을 통해 몸으로 경험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체험을 통해 배운 내용은 오래 기억되며 실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의식적으로 환경 조성하기: 몸과 마음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해 업무 환경이나 학습 환경을 의도적으로 조성할 수 있습니다. 밝은 조명, 편안한 의자, 정리된 책상은 효율성과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작은 변화가 장기적으로 업무 효율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 적극적인 신체 활동 참여: 신체 활동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와 감정을 해소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단순한 산책부터 요가, 운동까지 신체 활동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서적으로 균형 잡힌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신체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평소에 더 냉철한 판단을 내리기 쉬워집니다.
  • 경험의 연속성

    경험의 연속성

    경험으로서의 예술 요약

    • 생명체: 삶의 경험에서 오는 예술적인 것을 현대에 와서는 삶과 분리했다.
    • 생명체와 ‘천상의 사물들’: 타자와의 경험에서 예술의 원천이 나온다.
    •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 완결된 경험을 가져야 한다.

    완전한 경험의 경우, 형식이 갖추어진 것은 역동적인 조직화(성장)

    포괄적 종결을 향한 본질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저항, 긴장, 흥분의 전향이 바로 미적 경험


    경험으로서의 예술 배경 및 요약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은 1934년에 출판된 그의 주요 미학 저작입니다1. 이 책에서 듀이는 예술과 일상 경험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사건과 장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요 개념

    경험으로서의 예술

    듀이는 예술 과정의 본질을 물리적 ‘표현 대상’에서 전체 과정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는 ‘예술 작품’ 자체보다는 ‘경험’의 발전이 더 근본적인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일상과 예술의 연속성

    듀이는 정제된 예술 작품 경험과 일상적인 활동 및 사건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술이 일상생활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미적 경험

    듀이에게 미적 경험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 충만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그는 이를 인간 경험의 최고 형태로 보았습니다.

    예술의 기능

    • 경험의 변형: 듀이는 예술이 혼란스러운 이전 경험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정화한다고 보았습니다.
    • 도덕적 목적 전달: 예술은 목적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소통의 매개체: 듀이는 예술 작품을 인간 간 완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소통의 유일한 매체로 보았습니다.

    영향

    듀이의 이론은 20세기 미국 예술, 특히 추상표현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예술을 감상자의 관점이 아닌 창작자의 관점에서 탐구한 점에서 혁신적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예술을 일상 경험과 연결시키고, 미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재조명한 중요한 저작입니다.


    발췌 원문

    제 1장 생명체

    실제의 예술 작품은 경험과 함꼐하며 경험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온갖 형태의 인간적 노력, 인고, 성취 등의 목적이나 내용과도 연관이 없는 단절된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주의 깊은 사람의 이목을 끌어,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끼쁨을 주는 사건이나 광경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질주하는 소방차, 땅에 거대한 구멍을 파는 굴착기, 파리처럼 절벽을 기어오르는 사람, 높은 대들보 위에 앉아 작열하는 볼트를 주거니 받거닌 하는 사람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타는 장작 더미를 들쑤시는 사람은 불이 더 잘타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색색의 드라마에 매혹되며, 이런 저런 상상을 한다. 그는 무관심한 구경꾼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정신과 신체의 활동에 행복하게 몰입하는 사람들에 관한 한 콜리지 Samuel T.Coleridge가 시독자들에게 한 말은 타당하다. “독자들은 단지 혹은 주로 기계적인 호기심의 충동이나 궁극의 결말에 도달하고자 하는 부단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의 유쾌한 활동에 이끌린다.”

    조건과 기회를 바꾼다면 옛 장인들의 생산물에 손색이 없는 가치 있는 물건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예술로 알고 있는 그 무엇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갇히게 될 때, 그 자체로 향유할 만한 경험을 향한 충동이 일상 화녕에서 제공되는 발산 수단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외심과 비실재가 뒤섞인 아우라는 ‘정신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을 포함하는 반면에 ‘물질’은 설명이 필요하고 해명되어야 하는 경멸적인 말이 되었다.

    전쟁, 예배, 포럼 등에서 나타난 단체 생황에서는 이 장소나 기능이 가지는 특징과, 그것들에 색채, 우아, 위엄을 가져다 주는 예술 간의 분리가 왜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그림과 조각은 유기적으로 건축과 하나였으며 마찬가지로 건축물들도 사회적 목적에 일치되는 것으로서 설립되었다. 음악과 노래는 집단 생활의 의미를 완전하게 하는 의식과 제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연극은 집단 생활의 의미를 완전하게 하는 의식과 제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연극은 집단 생활의 전설과 역사의 활기찬 재연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서조차 그러한 예술은 직접적인 경험에 속하는 배경에서 분리될 수 없고 게다가 그 의미 깊은 성격을 유지할 수 없다. 드라마만이 아니라 운동 경기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교육하고 영광을 기념하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면서 종족과 집단의 전통을 축하하고 공고히 했다.

    아테네의 그리스인들이 예술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일종의 재현이나 모방의 활동이라는 개념을 행성햇다. … 예술과 일상 생활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증언이다.

    대부분의 유럽 미술관들은 국수주의나 제국주의의 발흥에 따른 기념물이다. 모든 수도에는 여러 가지 회화, 조각 등의 미슬관이 있는데, 과거 자국 예술의 위대함을 보일 목적으로 설림된 것이 있는가 하면, 그 나라가 타국을 정복하면서 노획한 전리품을 과시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도 있다.

    대체로 전형적인 수집가는 전형적인 자본가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나 국가도 오페라 하우스나 갤러리, 미술관으로 그들이 좋은 문화적 취미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산업은 기계화되어왔지만 예술가는 기계화된 작업으로 대량 생산을 해낼 수 없다.

    예술 철학들은 그 무엇도 서식할 수 없는 불모지에 예술을 위치시키고 또한 미적인 것(the esthetic)의 단지 관조적인 특성만을 비정상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그 평가를 다른 경험 양식들로부터 차단시켜 자기들만의 영역속에 가두어버리는 이론들은 주제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외적 조건들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라는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행복의 불가결한 요소인 심지적 지각을 쫓아내든가 혹은 그것들을 찰나적인 쾌의 흥분을 보상하는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미적 경험의 연속성을 정상적인 삶의 과정들로 회복하는 문제

    일상 경험의 의미가 제대로 표현될 때 예술 작품이 일상에서 유출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현행 이론들의 난관은 예술을 기성의 구획으로 위치시킴으로써, 혹은 구체적 경험의 대상들과 단절시켜 예술을 ‘정신화’하는 예술의 개념으로부터 이론이 시작되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화에 대한 대안은 예술 작품의 비속화, 저열한 물질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들이 일상의 경험 속에 존재하는 성질들을 이상화하는 방식을 밝히는 어떤 개념에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직접적인 인간적 배경 속에 놓일 경우, 격리적인 예술 이론들이 일반의 동의를 얻을 때보다 더 폭넓은 지지를 얻을 것이다.

    우리가 ‘정상적 경험’이라 할 때 그 의미에 대해 명료하고 사리에 맞는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술이 일상 경험으로부터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뿐, 이 문제들에 대해 그 이상의 답은 제시할 수 없다. 다행히도 그러한 개념에 이르는 길은 열려 있고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다. 경험의 본질은 생명의 필수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다.

    생명체의 피하 기관들은 시체 밖에 있는 것과 접속하는 수단이며, 살기 위해서는 화해하고 방어하고 정복함으로써 외계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매순간 외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또학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환경 안에서 무언가에 의존해야 한다. 생물의 생애와 운명은 환경과의 상호 교환과 밀접하다. 외면적으로가 아니라 가장 긴밀한 방식으로 말이다.

    절서는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힘드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조화로운 상호작용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질서 자체는 발전 성장한다. 질서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들을 그 균형잡인 운동 속에 포용한다.

    자기와 환경과의 통합의 상실, 그리고 일치의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은 인간 안에서 지속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의식적이게 된다. 그 리듬의 조건들은 사람이 목적을 정하는 데 소재가 된다.

    직접적 경험은 자연과 인간이 상호 작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상호 작용 속에서 인간의 활동 에너지는 결집되고, 완화되고, 억압되고, 좌절하고, 승리한다. 여기에 결핍과 충족이라는 규칙적 박동들, 그리고 행위와 행위를 억제하는 맥동들이 수반된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정성과 질서를 가져오는 모든 상호 작용은 리듬이다. … 질서 있는 변화가 존재한다. 변화는 한꼐 내에서 움직인다.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파멸이자 죽음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새로운 율돌이 생겨난다. … 그 결과는 조화와 평형이다.

    행복과 기쁨은 우리 심중 심연에까지 이르는 성취에서 온다. 즉, 온전한 우리와 생존 조건과의 화합이라는 성취 말이다. 삶의 과정에서 평형의 시기에 이르는 것은 동시에 환경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 관계는 투쟁을 통해 새로운 적응을 이루어내는 과정에 있다. 완성의 시간은 또한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다. 성취와 조화의 시간에 수반되는 향유를 그 기한을 넘어서까지 영속화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의 삶과 과거, 미래 사이에 흔히 틈새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경우 과거는 그들에게 무거운 짐처럼 지워져 있고, 후회, 사용되지 못한 기회, 원하지 않았던 결과의 의미로 현재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과거는 자신 있게 앞으로 전진시키는 수단들의 창고가 아니라, 하나의 억압으로서 현재에 걸쳐져 있다. 그러나 생물은 과거를 그엊ㅇ함은 물론, 과거의 어리석음과도 타협하며, 그것들을 현재의 신중함으 배가시키는 타산지석으로 삼는다. 생명체는 과거에 이루어진 것 위에서 살고자 하지 않고, 현재를 알려주는 것으로서 과거의 성공을 이용한다. ‘고요한 반향’ 덕분이다.

    행복한 경험의 시간은 경험이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전망에 몰입되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순간이 미의 이상(esthetic ideal)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가 근심을 덜게 하고 미래의 전망들이 불안하지 않을 때에만 생물은 환경과 온전히 융합되며, 따라서 제대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과거가 현재를 강화하고 미래가 현재를 고무하는 계기들을 아주 치열하게 경축하는 것이다.

    개는 결코 현학적이지도 아카데믹하지도 않다. … 과거가 의식속에서 현재와 단절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이 복제하기 위해 있는 모델이나 혹은 물건을 꺼내 쓰기 위해 있는 저장소처럼 존재하는 경우 말이다. 이 경우 현재 속에 융합된 과거는 계속 위력을 발휘하며, 다른 것을 물리치고 나아간다.

    경험이 진실로 경험인 한, 그것은 고양된 활력이다. 경험은 누군가 혼자만의 감정이나 감각 속에 밀폐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은 세계와의 능동적이고 빈틈없는 교류를 의미한다. 최고의 경험은 사물과 사건들의 세계와 자아의 완전한 상호 침투를 의미한다. 그것은 변덕과 무질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느 ㄴ것이 아니다. 경험은 정체가 아닌 안정성, 즉 리드믹하게 발전해가는 안저엉이라는 우리의 유일한 예증을 제공해준다. 경험은 예술의 맹아이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것은 사물들의 세계에서 힘겹게 얻은 위업이자 성취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초기의 형태에서도 미적 경험이라는 유쾌한 지각의 기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제 2장 생명체와 ‘천상의 사물들’

    ‘감각’의 읨는 광범위하다. 감각적인 것, 선정적인 것, 감수적인 것, 가각적인 것, 정감적인 것, 감성적인 것 등. 감각은 있는 그대로의 신체적, 정서적 자극부터 의미 그 자체 즉 직접적 경험에 나타나는 여러 사물의 의미 까지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 각 용어는 생명이 감각 기관들을 통해 나타날 때의, 유기적 생명체의 삶의 어떤 현실적 측면과 양상에 관계된다. 그러나 그 자명한 의미와 같이 경험 속에 직접적으로 구체화되는 의미로서의 감각은, 감각 기관들이 온전한 실현에 이를 때의 그것들의 기능을 표현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체가 자기 주위 세계의 작용에 직접 관여하는 수단인 그 기관들이 바로 감각이다. 이러한 참여 속에서 이 세계에 대한 다양한 경이와 광채는 생명체가 경헌하는 성질들이 되어 현실화하게 된다. 이 경우 소재는 유기체의 활동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운동 기관과 ‘의지’ 그 자체가 이 참여를 수학하고 유도하는 수단들이기 떄문이다. 소재는 또한 ‘지적인 것’에 대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정신이 감각을 통해서 참여를 의미있게 하는 수단이며, 그 의미와 가치들을 추출하고 유지하며 살아 있는 생명체와 환경 간의 교통에 더 많은 기여를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유기체와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이 완전하게 수행될 때 그것은 참여와 소통으로 변하며, 경험은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이자 징표이며 보상이다. 운동 기관과 결부된 감각 기관들은 이러한 참여의 수단이다. 따라서 기관들 모두의 손상은 그것이 실천적이든 이론적이든 협ㅅ소하고 둔한 생활-경험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마음과 신체, 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등의 여러 가지 대입은 근본적으로 생활이 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 기원이 있다. 그것들은 위축과 후퇴의 징표이다.

    다른 동물들에 비교해 인간에게는 저항화 긴장의 기회가 더욱 많고, 실험과 발명이 더욱 요구되고, 따라서 그 활동은 아주 참신해지고 성찰은 광범위하게 심화되고 감정은 한층 치열해진다. 유기체의 복잡성이 증가됨으로써 환경과 관련한 투쟁과 완성의 리듦들은 다양해지고 장기화되며, 리듬 내부에 무한히 다양한 미세 리듬들을 포함하기에 이른다. 삶의 밑그림이 확장되고 풍요로워진다. 일의 성취는 더욱 커지고 더욱 미묘한 음영을 드리우게 된다.

    공간은 인간이 종사하는 다양한 행위와 체험들로 질서 잡혀 있는 둘레의 광험위한 장면이 된다. 시간은 몇몇 철학자들이 주장해온 순간적인 점들의 연속도 아니고, 끝없는 한결같은 흐름도 아니다. 시간은 또한 대망의 충동, 전진과 후퇴 운동, 저항과 휴지라는 리드믹한 조수의 간만이 수행과 완성으로 조직된 매개이며, 또한 이것들을 조직하는 매개이다. 시간은 성장과 성숙의 질서이다.

    섬광이 감음의 세계에 비출 때 대상의 순간적인 인지가 이루어 진다. … 형식이란 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발전해가는 생활 경험의 모든 과정 속에서 나타난 시공의 조직에 포함된 것을 명료하게 하는 기술이다.

    … 그때 새는 둥지를 짓고 비버는 둑을 짓는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말을 여기에 적용하는데 주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갖 숙고와 의식적 지향은 여러 생득적인 에너지의 상호 활동을 통해 이미 유기적으로 수행된 일에서 생겨난다. … 인류의 탁월한 공헌은 자연에서 발견된 여러 관계들을 의식한 데 있다. 의식에 의해 인간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인과 관계들을 수단과 결과의 관계로 바꾸고 있따. 아니 오히려 의식 그 자체는 그러한 변화의 단서가 된다.

    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추상적으로 서술되어온 것들에 대한 구체적 증거이다. 예술의 존재는 사람이 자기 생명을 확장 시킬 의도로 물질이나 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증거임, 또한 인간 자신과 기관, 즉 두뇌, 감각 기관, 근육 조직등의 구조와 일치해 그것을 행한다는 증거이다. 예술은 생물의 특징이 되는 감각, 욕구, 충동, 활동 등의 총합을, 인간이 의식적으로 혹은 의미의 차원에서 복구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생생하고 구체적은 증거이다. … 그러나 의식의 이런 개입은 또한 의식적 이념으로서의 예술의 이념으로 인도하고, 인류 사상 최대의 지적 위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결국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단절되고 서로 대립될지라도, 그 이상이 구체화될 수 있고 실현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이 있음에 틀림없다. ‘질료’가 의미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양자 대립의 사상이 유행한다는 것은 자유로운 생각들을 실행으로 옮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을 억압적인 부담으로 변환시키는 힘, 또한 잇ㅇ으로 하여금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분위기 속의 막연한 열말이 되게 하는 힘이 광범위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자연은 인간의 모태이자 터전이다.

    생기 있게 자라는 풀밭이 보이지 않고 새소리나 시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 을 때면 나는 온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이 세계나 인생은 자신들이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유쾌하거나 재미있지 않으며, 자신들은 끝까지 냉정하게 세계 나 인생을 바라본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온전히 살아 있다 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세계도, 혹은 세계 안의 어떤 것도一 풀잎 하나조차-명확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W. H. Hudson

    사람이 사고라는 최고의 비상으로 도달한 적이 있거나, 어떤 예리한 통찰로 꿰뚫어본 적이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감각의 중심이자 핵심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과학이나 학문과 마찬가지로음악, 회화, 조각, 건축,드라마, 소설 등이 종교의 시녀 역할을 했다. 교회 밖의 예술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교회 의식과제례는최대한의 정서적, 상상적 매력으로 부여하는 조건 아래 만들어진 예술이었다. 왜냐하면 이 예술을 접한 사람들이 영원한 영광과 축복을 얻는 데 필요한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확신 이상의 격한 심취를 예술 이외의 무엇이 그들에게 줄 수 있을지 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세 기독교는부분적으로그것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에 의해 번창했다. 도덕 혹은 영적 감정에 대해 갖가지 감각적 심상들올 가지고 있었던 라틴 찬미 작곡자들이 깊이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었다. 열정의 출구가봉쇄되면 신경의 긴장이 생기는데, 거기서 감각적 세계는 찬란한 광채와 구원과 합일한다. 그리하여 모든 붉은 것은 피가 되고, 물은 눈물이 되었다. 모든 중세의 시가(詩歌)에서 감각은 극도로 왜곡되었으며, 자연물은 기괴한 열광적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자연물들에 대해 중세 사람들은 깊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감각은 객관적이지도 않았고, 우리 외부 세계로의 현실적인 도피처도 아니었다.

    예술가는 “일월성신 혹은 지구나 지상의 여러 가지를 그보다 더 위대한 것, 즉 천상의 것一창조주가 몸소 만든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一올 만들어내는 소재”로서 바라볼 수 있올 것이다. 키츠를 인용함에 있어 그가 예술가의 태도와 살아 있는 생명체의 태도를 동일시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을 시의 취향으로서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식하고 반성한 후 분명히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나 또한 공감하는 바이다.

    매와 같은 본능과 자신의 목표물에서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아주 위대한 부분이다. 매나 사람이나 짝올 원한다. 이들 둘올 보라. 둘 다동일한 방식으로 시작하여 상대를 획득한다. 둘 다 둥지를 필요로 하며, 동일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둘 다 동일한 방식으로 먹이를 획득한다. 고상한 동물인 인간은 담배를 즐기지만, 매는 구름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이것은 그들의 여가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색적인 사람에게 삶의 재미를 주는 것이다. 들판에 나가 걷다 보면 담비나 들쥐가 질주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무엇을 위해 질주하는 것일까. 생명체는 목적을 갖고 있고, 그의 눈은 목적으로 말미암아 빛난다.

    여기서까지 내가 가장 인간적인 동물처럼 본능적 과정을 추구하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어떤 주장이나 견해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암흑 가운데서 희미한 빛을 구하나 비록 어리지만 이것저것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홈 없다 할 수 있을까? 내가 담비의 민첩함이 나 사슴의 불안감을 보고 즐기듯이, 본능적이기는 하나 나의 정신이 빠져들 수도 있는 우아한 태도로 즐거워하는 훌륭한 존재란 없는 것일까?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형오감올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발휘되는 에너지는 볼 만하다. 가장 평범한 남자가 싸울 때도 기풍이 있는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가본다면 우리의 추리라는 것에서 이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나름대로 훌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가를 구성하는 데 진수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추리도 있지만, 추리는 동물의 지체나 운동과 같이 본능의 형식을 취할 때 시가 되며, 아울러 아름답고 기풍이 있다.

    첫째, 우리reasoning’는 야생 동물이 목표물을 향해 하는 운동과 비슷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자발적이고 ‘본능적’이며, 본능적일 때 감각적이고 직접적이고 시적(詩的)이라는 확신이다. 둘째, 이 확신의 다른 면은 그가 추리로서의 ‘추리’, 즉 상상력과 감각을 배계한 추리에 의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에게서조차 사색을 결론으로 이끄는 데서 동물적인 좋고 싫음이 개입된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감정의 흐름대로 취사선택한다. 최고의 ‘이성’은 완전한 이해와 자기 충족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으며, 관념을 정서적 감각 안에 구체화하는 작용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의 통찰이면 충분하다. “이는 당신들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라는 말이다. 이는 ‘사실과 논거를 따라 성급하게 도달하는 일’이 사태를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혼란과 왜곡을 가져오는 정황을 의미한다.

    키츠가 극도의 위로와 깊은 확신을 찾은 것은 매우 강렬한 미적 지각의 순간에서였다. 그의 시 말미에 언급된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궁극적으로 두 가지 철학이 있을 따름이다. 그중 하나는 그 모든 불확실성, 신비, 회의, 어중간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삶과 경험을 받아들이며, 그 자체의 성질들을 심화하고 강화하기 위하여-상상력과 예술에 대하여-그 경험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 3장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

    경험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환경 조건의 상호 작용이 생활 과정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항과 갈등의 상태에서는 이 상호 작용에 내포된 자아와 세계의 양상이나 요소가 정서와 관념으로써 경험을 규정해서 거기에서 의식적인 의도가 발생한다. 그러나 경험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때로 불완전하다. 사물들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경험으로 구성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주의가 산만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지기도 한다. 우리가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 바라고 얻는 것 등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쟁기질하다가 날을 접기도 하며, 일을 시작했다가 멈추기도 하는데, 이는 경험이 처음의 목적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장애나 내면의 무기력 때문이다.

    그러한 경험과는 반대로, 경험되는 내용이 순조롭게 완성에 다다를 때 우리는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 그럴 때만 경험은 내면적으로 완성되고, 경험 전체의 흐름 속에서 다른 경험과 구별된다. 작풍 하나가 아주 만족스럽게 종결되며,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게임이 최후까지 진행된다.

    경험에서 흐름은 무언가로부터 무언가로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경험을 하는 경우 연속적인 융합이 일어나고, 따라서 간헐도 없으며, 기계적인 접합점도 없고, 부동의 중심들도 없다.

    경험에는하나의 통일성이 있어, 경험에 ‘그 식사’, ‘그폭풍’, ‘우정의 결렬’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사고 과정의 이론적 공식은 종종 ‘결론’과, 발전해가는 모든 완전한 경험이라는 절정 국면과의 유사성을 교묘히 감추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실제 ‘사고’라는 경험에서는 하나의 결론이 명백해질 때만 전제가 발생한다. 폭풍의 격렬함이 절정에 이르다가 이윽고 서서히 장장해지는 것을 보는 것 같은 경험은 중점 내용의 지속적 진행의 하나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대양처럼 경험에도 계속되는 파도들이 있다. 착상들이 밀어닥쳐 오다가 부딪쳐 포말로 부서지며, 또한 함께 밀어닥치는 파도에 떠밀린다.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예상과축적이라는 운동의 종결이며, 결국 완성에 이르는 운동이다. 하나의 결론은 개별적인 것이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동의 완성이다.

    경험은 그 자체의 미적 성질올 지니고 있다

    정서적 성질이 지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이 탐구를 정당화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계기일 뿐 아니라, 탐구가 이 성질로 완성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지적 활동도 하나의 통합적 사건(즉, 하나의 경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경험을 수행하는 데는 관심이 개재한다. 그 경험이라는 것이 세계에 해로울지도 모르며,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에도 미적 성질이 있는 것이다.

    선한 행위를 비례, 우아, 그리고 조화를 가진 어떤 행위와 동일시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선미라는 것은, 도덕적 행위 특유의 미적 성질의 한층 명백한 예이다

    많은 경험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의 사건과 그 선행 사건 그리고 후속 사건과의 관련에 관심을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깊이 행동하는 경험 속에서 조직할 수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취사선택하는 것을 조절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이 명확히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단호하게 배척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의 압박에 따라 굴복하고, 혹은 피하고, 혹은 타협한다. 거기에는 시작과 중단이 있지만, 진정한 단초나 완결은 없다. 하나의 사물은 또 다른 사울올 차지하지만, 그것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계속 지탱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경험이 있지만 그것은 아주 산만하고 느슨하여 도저히 ‘하나의 경험’이라 할수가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경험들은 비(非)미적인 것이다.

    자체의 완성을 목표로 진행하고 발전하는 경험의 특징들이다.

    성숙과 고착은 정반대의 것이다. 투쟁과 갈등은,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그것들이 하나의 경험을 발전시키는 수단들로 경험된다면 그 자체로 향유될 만한 것이다. 단지 투쟁과 갈둥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다. 투쟁과 갈등은 경험을 진전시키는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

    경험은 정서적이지만 경험 속에 정서라 불리는 것들이 분리되어 존재하지는 않는다.

    정서는 확실히 자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결과이든 기피해야 할 결과이든 어떤 결과를 향해 운동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갖는 자아에 속한다.

    정서는 어떤 경험의 다양한 부분들 가운데, 그리고 다양한 부분들을 통해 통일성을 부여한다. 통일성이 앞에서 기술된 그런 종류의 것인 경우, 경험은 두드러지게 미적인 경험이 아닐지라도 미적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경험이란 다양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 자체의 완성으로 향하는, 진행과 정지를 포함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공통의 패턴의 개요를 말하자면, 모든 경험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그것이 살고 있는 세계의 어떤 국면과의 사이에서 행해지는 상호 작용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경험은 패턴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계에 작용을 행사하는 것과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 즉 능동과 수동이 단지 교차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관련하에 행해지는 데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행위와 그 결과는 반드시 지각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모든 지성의 목표이다.

    감수성의 과잉 또한 경험의 완성에 방해가 된다.

    능동적으로 행해지는 것과 수동적으로 행해지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성의 일이기 때문이며,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 속에서, 이미 행한 것과 앞으로 행할 것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란 무용한 사치품이나 초월적인 관념의 소산으로서 외부에서 경험 가운데로 침입해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정상적이고 완전한 경험을 가진 성질의 명료하고도 강화된 발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나는 이 사실이야말로 미학 이론이 세워질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기초라고 생각한다

    때 ‘예술적artistic’이라는 말과 ‘미적esthetic’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명료하게 합쳐 함축하는 영어 단어는 없다. ‘예술적’이라는 말은 본래 창작의 행위와 관계되지만 ‘미적’이라는 말은 인식과 향유와 관계되 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함께 묶어 표현하는 하나의 낱말이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이란 표현에 있어 완벽하고자 하는 노력이다,반면 매튜 아널드Matthew Arnold는 예술을 “순수하고도 결점 없는 기량”이라고 부른다

    계적’이라는 말은 앞서 지적했듯이 감상적, 인식적, 향유적인 것으로서의 경험과 관련된다. 그것은 생산자의 관점보다는 향유자의 관점을 드러 낸다. 그것은 취미taste)이다

    진실로 예술적이기 위해서는 미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즐길 만한 수용적 인식을 위한 것이 어야 한다. 물론 예술가는 창작하는 동안 꾸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지각이 사실상 미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계적인 과정 속에서 다음 단계를 향한 자극으로서 행해지고 사용된 것을 중립적으로 냉정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예술은 경험을 경험답게 하는 관계와 같이 능동적 행위와 수동적 행위, 에너지의 방출과 흡입의 관계를 그 형식 속에서 결합한다.

    예술가는 작업하는 동안 인식자의 태도를 자기 자신 안에서 구체화한다.

    모든 미적 지각에는 정열passion이라는 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격렬한 분노, 공포, 질투와 같이, 우리가 정열에 압도당할 때 그 경험이 미적이지 않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 경우 정열을 발생시킨 활동의 성질에 대한 관계가 감지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경험의 소재에는 균형과 안정의 요소들이 없다. 왜냐하면 이 균형과 안정은 우아함이나 위엄이 있는 행동의 경우와 같이, 행위가 그것이 유지하는 관계들의 적절한 감지에 의해, 예를 들면 때와 장소에 맞게 제어되는 때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창작의 과정은 미의 인식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손과 눈 둘 다 전인적 존재의 기관으로서 활동하지 않을 때, 자동적인 걸음걸이의 경우처럼 기계적인 연속의 감각과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경험이 미적이라면 손과 눈은 전 생명체가 시종 작동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표현은 정서적이며 목적에 의해 유도된다.

    능동적 행위는 힘차고 수동적 체험은 깊고 강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 속에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결속되어 있지 못하다면 행해진 것이 온전히 미적일 수는 없다.

    만약 예술가가 행위 과정에서 어떤 참신한 비전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는 기계적으로 행위하며 마음속의

    청사진처럼 일정한 원본을 반복하는 것이다. 창의적 예술 작풍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관찰과 질적 관계들의 지각 속에서 표현된 지성을 통해 규정된다.

    진정한 예술가의 작품은 경험이 발전하며 부단히 변화해나가는 동안, 지각속에서 통일된 하나의 경험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외적인 구체물이 없으면 경험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인식이란 그것이 자유롭게 발전할 기회를 갖기 전에 정돈되는 지각이다. 인식을 할 때는 지각 행위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작이 인식된 사물을 완전하게 지각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리에서 어떤 사랑을 인식할 때도, 그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를 할 것인지 아니면 피할 것인지를 정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즉 인식이 어떤 다른 목적에 부합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인식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정지된다

    단순한 인식은 적당한 이름표나 라벨이 붙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지각 행위는 유기체 전신을 통해 순차적으로 확장해나가는 파동에 의해 진행된다. 따라서 정서가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부가되는 것과 같은 일이 지각에서는 없다.

    이유는 관람을 위해 관람자가 자기만의 경험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창작은 원래의 작가가 수동적으로 체험한 것들에 비견되는 관계들올 포함해야 한다.

    경험된 전체 내에서 물리적으로 산재해 있는 세부와 부분들을 모으는 일이 행해진다.

    지금까지의 고찰들은 의미심장한 하나의 경험과 미적 경험 간의 공통점을 보여중과 동시에 특수한 점을 강조하여 양자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전자, 즉 하나의 경험은 미적 성질을 지닌다. 그렇지 않으면 그 소재들은 단일의 통일적 경험 속으로 완성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근원적 경험 속에서 실천적, 정서적, 지적인 것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또한 어느 한 속성으로 하여금 다른 속성들의 특징에 반하여 압도하게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정서적 경험은 부분들올 단일의 전체 안으로 규합한다. 그리고 ‘지적’이라는 것은 다만 경험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실천적practical’이라는 것은 유기체가 그것울 둘러싸고 있는 사건들과 대상들과 상호 작용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종속적인 그것들이 바로 지배적인 성질이다. 즉, 경험이 그 자체로 완전한 경험다운 성질인 것이다.

    모든 완전한 경험의 경우, 형식이 갖추어진 것은 역동적인 조직화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조직화를 역동적이라 하는 것은 이것올 완성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며, 그것이 하나의 성장이기 때문이다.

    포함적, 완성적 종결을 향한 본질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저항, 긴장, 흥분의 전향이 바로 미적 경험인 것이다.